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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 프로필, 정치적 변천사

몽비아 2024. 2. 23.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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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 프로필, 정치적 변천사

개혁신당이 공천관리위원장으로 김종인을 선임했다고 23일 밝혔습니다. 이준석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위해 공천관리위원장을 선임한다"며 "김종인 위원장은 어느 당보다 중요하고 정무적 능력이 뛰어나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김종인 공관위원장을 중심으로 훌륭한 인재를 발굴하여 국민들에게 신속하게 공천 업무를 제공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개혁신당은 김종인 위원장을 공관위원장으로 영입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새로운 미래 측과의 결별 과정에서도 김 위원장의 이름이 언급되었습니다.

 

김종인


김종인 프로필


출생
1940년 7월 11일 (83세)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림리
(현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거주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건덕빌라[1]
본관
울산 김씨
현직
대한발전전략연구원 이사장
재단법인 보통사람들의시대 노태우센터 고문
개혁신당 공천관리위원장
재임기간
제24대 보건사회부 장관
1989년 7월 19일 ~ 1990년 3월 19일
노태우 정부 제3대 경제수석비서관
1990년 3월 17일 ~ 1992년 3월 30일
서명
 

 

김종인은 한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원로 정치인으로, 제24대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장관과 제11·12·14·17·20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에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활동한 바 있습니다.

 

또한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의 손자입니다. 2010년대 이후 정치계에서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해결사로 인식되며 "킹메이커"의 이미지를 가졌습니다.

 

그는 승리를 이끌어낸 선거들이 많았는데, 이는 새누리당 비대위원 시절의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와 제18대 대통령 선거,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대표 시절의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그리고 2021년의 재보궐선거 등이 포함됩니다.

 

김종인은 "여의도 포레스트 검프"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손을 거쳐온 대통령으로는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과의 관계가 항상 원만하지 않았고, 특히 회고록에서는 박근혜와 문재인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김종인은 미국과 독일 등 해외 주요 정치, 경제계 인사들과의 인연을 가지고 있으며, 국내외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김종인 선거 이력


한국 정치에서 극히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는 인물은 비례대표(구 전국구) 의원으로 5선을 달성한 사람입니다. 김종인은 11대 총선, 12대 총선, 14대 총선에서는 보수정당 소속으로 당선되었고, 17대 총선과 20대 총선에서는 민주당계 정당 소속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 나온 지역구 출마기록인 13대 총선에서는 이해찬에게 패배하여 지역구에서는 당선되지 못했습니다. 이는 한국 정치지형에서 흔치 않은 이력으로, 비례대표가 주로 초선 의원들을 위한 자리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주목받았습니다.

 

또한,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제20대 국회 최고령 국회의원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이 인물은 다섯 번의 의원 생활 중 14대 국회의원 시절 한 번은 뇌물수수로, 다른 한 번은 20대 국회의원 시절 탈당으로 인한 의원직 상실로 의원 임기를 전부 마친 것은 11, 12, 17대 국회뿐입니다.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1
민주정의당
5,776,624 (35.6%)
당선 (49번)
초선
1985
7,040,477 (35.2%)
당선 (32번)
재선
1988
서울 관악 을
민주정의당
34,752 (27.12%)
낙선 (2위)
1992
민주자유당
7,923,718 (38.5%)
당선 (11번)
3선[53]
2004
새천년민주당
1,510,178 (7.1%)
당선 (2번)
4선
2016
더불어민주당
6,069,744 (25.5%)
5선[54]
 

김종인 소속 정당 변천사

소속
기간
비고
민정당
1963
정계 입문
무소속
1963
탈당
국민의당
1963 - 1964
창당
무소속
1964 - 1973
탈당
민주공화당
1973 - 1980
입당
무소속
1980 - 1981
정당 해산
민주정의당
1981 - 1988
창당
무소속
1988 - 1992
탈당
민주자유당
1992 - 1993
전국구 국회의원 후보로 영입
무소속
1993 - 2004
뇌물죄로 당선 무효 확정 후 탈당
새천년민주당
2004 - 2005
입당
정계 복귀
민주당
2005 - 2007
당명 변경
중도통합민주당
2007
합당[56]
민주당
2007 - 2008
당명 변경
통합민주당
2008
합당[57]
민주당
2008
당명 변경
무소속
2008 - 2011
당명 변경 후 탈당
한나라당
2011 - 2012
입당
새누리당
2012 - 2013
당명 변경
무소속
2013 - 2016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더불어민주당
2016 - 2017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로 영입
무소속
2017 - 2020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58]
미래통합당
2020
21대 총선 총괄선거대책위원장으로 영입
국민의힘
2020 - 2021
당명 변경
무소속
2021 - 2024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59][60]
개혁신당
2024 - 현재
22대 총선 공천관리위원장으로 영입

김종인의 정치적 전환 2016~2024년


1973년 3월에 한국으로 귀국한 김종인은 당시 32세로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조교수로 임명되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서강대 학부생 시절에 김종인의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김종인은 서강학파로 분류되지만, 선성장 후분배와 재벌 육성을 중심으로 한 압축 성장을 주장해온 서강학파 선배들과는 입장을 달리하는 2세대로 구분됩니다.

 

유신 시대부터 박정희 정부에서 정책자문역할로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참여한 김종인은 김재익과 함께 서독의 부가가치세를 배우러 출장을 다녀와 연구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는 이듬해 김재익의 중매로 김미경 교수와 결혼했는데, 김미경은 이화여자대학교 식품영양학과 명예교수이며 박정희 정부에서 재무부장관과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의 딸입니다.

 

김종인-젊은시절

 

김종인은 훗날 박정희 전 대통령을 평가하며 "역대 대통령 가운데 경제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유일한 대통령"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는 2016년 1월 더불어민주당 대표로 전직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는 자리에서 박 전 대통령의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이끈 공로를 찬양했습니다. 김종인은 또한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는 보수주의 경제이론을 지지합니다.

 

1980년에는 국보위 자문위원으로 참여하며 전두환,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창당에 발기인으로 참여했습니다. 이후 1981년부터 1988년까지는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1대, 제12대 전국구 국회의원을 역임했습니다. 특히 1987년 제6공화국 개헌 당시에는 경제민주화 조항을 직접 작성하고 관철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노태우 정부 때는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재벌의 폭주를 견제하고 기업구조조정과 체질개선을 주도하여 균형 잡힌 경제적 성과를 이루려 했습니다. 그러나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후 국민은행의 이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1989년부터 1990년까지는 제24대 보건사회부 장관을 맡았고, 1990년부터 1992년까지는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활동했습니다. 경제수석을 떠난 후 1992년에는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제14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러나 1993년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김종인의 정치인생에서 유일한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했으며,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정치적 암흑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정치권은 그와 거리를 두게 되었고, 그의 영향력은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이후에도 김종인은 정치적 활동을 이어갔으나 그간의 영향력을 되찾지 못했습니다. 현재까지도 그의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으로 인한 전력을 이용하여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어쨌든 김종인은 2011년 한나라당(새누리당) 비대위 관련 문제로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 직전 당대표였던 홍준표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비대위원이었던 김종인이 당시 홍준표의 지역구인 서울 동대문구을을 거론하면서 당 대표를 사퇴한 사람에게 공천을 주면 안 된다고 발언한 바가 있습니다.

 

당시 홍준표는 자신이 조사했다고 주장하는 뇌물 사건 피의자에게 공천받지 않으려고 했으나, 출마할 사람이 없어서 당에서 홍준표를 공천했습니다. 이후 2020년 김종인이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으로 거론되자, 홍준표는 뇌물 사건을 언급하면서 "이제 그만 공적 생활을 정리 하시고 정계에 기웃거리지 말라. 그만 하면 오래했다"고 김종인을 비판했습니다.

 

그 후, 대한발전전략연구원을 창립해 스스로 이사장에 취임하여 정치와는 거리를 두며 오랜 기간 동안 야인으로 활동했습니다. 2004년 3월에 새천년민주당에 영입되며 정계에 복귀했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면서 원내로 돌아왔습니다.

 

2007년 대선에서는 당적은 유지하면서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를 지지했습니다. 이 후보를 지지한 것은 단순한 지지가 아니라 정동영의 대선 후보 등록 회견 때부터 함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선에서 정동영은 이명박에 패하며 정권을 내주게 되었습니다.

 

이후 2008년 이명박 정부에 대해 경제 정책에서 우클릭만 거듭한 채 끝난 참여정부에 대해 비판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발언 이후 딱 두 달 만에 세계금융위기가 발생하였고, 이듬해인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도 서거하게 되었습니다.

 

 

2008년에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고 노무현 서거 이후 한동안 정치에서 거리를 두었지만, 2011년 12월에 중도 확장을 노린 한나라당-새누리당과 박근혜 비대위원회에 영입되어 경제민주화 공약 설계를 맡았습니다. 당시 이준석은 한때 박근혜 정부의 정도전이라고 평가되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종인은 당내에서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지만, 새누리당은 과반 152석을 차지하여 총선에서 압승했습니다. 이후 2012년 9월부터는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습니다. 그의 경제민주화 의제와 공약은 2012년 12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에 크게 기여했지만, 박근혜가 집권하자마자 이를 폐기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이를 쿨하게 받아들였습니다. 2014년 12월에는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이후 김종인은 야인으로 지내며 대권 주자 안철수의 경제 멘토로 활동했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2016년 1월에는 이를 부인하고 그런 적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해 1월, 20대 총선을 앞두고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습니다.

 

이에 곧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겸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추대되어 2월부터는 더불어민주당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이전 9년간 패배를 거듭해온 더불어민주당은 김종인의 합류로 인해 탈출구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는 당내 중도적 인사들의 탈당을 막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대위 초기에는 몇몇 인사들의 영입을 통해 당을 정비하면서 어수선했지만, 후에 선거 공천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선거 공천에서 특정 계파의 의원들만을 대상으로 한 공천 컷오프나 지역에 따른 측근의 공천 등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김종인은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는 당 대표에 출마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당내에서 점차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2016년 8월 27일, 새롭게 선출된 추미애 전 대표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직에서 퇴임하였습니다.

 

 

그 후 페이스북 계정을 개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요즘 정치권의 SNS 대세에 본인도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017년 3월 27일에는 대선 출마를 기정사실화하고, 2017년 4월 5일에는 대선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이때 그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대선의 목적은 내각제 개헌과 자신의 정치 활동의 최종 목표인 경제민주화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일주일 뒤인 12일에는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며 불출마를 선언했습니다. 그 후 2017년 4월 30일, 대선 레이스의 종반부에서 갑작스럽게 김종인은 내각 구성권을 약속받고, 안철수 대선후보에 대한 지지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는 이후 국민의당 개혁공동정부준비위원장을 맡았습니다.

 

대선 후보 중 안철수, 홍준표, 유승민 후보를 모아 ‘반문재인 연대’를 구성하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3명 모두 서로와의 연대를 거부하고 대선 결과는 문재인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2020년 3월, 김종인은 미래통합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반감과, 자신이 문재인 정부 탄생의 기틀을 마련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총선을 고작 2주를 남겨놓고 영입되어 너무 늦었다는 평가가 많았습니다. 선거의 핵심인 공천을 황교안 지도부와 김형오 공관위가 사실상 망쳐놓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미래통합당에 완전히 적응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였고, 자주 더불어민주당이라고 실수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결국 이에 대한 우려가 현실이 되어 2020년 4월 15일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은 역대급 참패를 하였습니다. 개표 결과 103석으로 개헌 저지선을 겨우 넘겼고, 김종인이 이끈 선거에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참패했습니다.

 

 

이후 당내에서는 김종인을 비대위원장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일각의 반발도 있었고, 김종인 전 위원장이 사실상 취임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2020년 5월 22일, 내년 재보선까지 비대위원장을 맡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김종인 본인도 이를 수락하였습니다.

 

4.15 총선 패배 이후 미래통합당에 대해 대대적 혁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1970년대생 가운데 경제 전문가가 보수의 대권주자로 등장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에 따라 김종인은 40대 기수론을 공식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김종인 비대위에 찬성하던 홍준표가 반대파로 태세를 전환하며,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을 언급하여 비판했습니다. 정진석 21대 총선 당선인은 페이스북을 통해 홍준표가 직접 전화로 "김종인 만한 사람이 없다. 비대위원장으로 모셔야 한다. 정 대표가 김종인을 띄워달라"고 요청했었다는 사실을 공개하며 홍준표를 비판했습니다.

 

정치에 밝은 인물답게 김종인은 현재 대중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젊고 개혁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기성 정치인보다는 젊은 정치인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당내 인물들은 이러한 행보에 반발하고 있습니다.

 

김종인은 비대위원장으로 취임한 이후 계속해서 파격적인 이슈를 제기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기본소득제와 박근혜 탄핵 및 구속에 대한 대국민 사과 검토 등을 언급하며 이전의 미래통합당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리얼미터의 지지율 집계에서 민주당을 처음으로 넘어섰습니다. 2020년 9월 2일, 김종인은 미래통합당의 당명을 국민의 힘으로 변경하였습니다. 그 이후 당 분위기가 다운되는 등의 어려움을 겪었지만, 12월부터는 분위기가 반전되며 재보궐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이로써 1년도 채 남지 않은 2022년 대선의 주도권이 더불어민주당에서 국민의 힘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김종인은 자신이 이끈 정당이 집권에 성공한다는 공식을 다시 한 번 증명하였습니다.

 

2022년 1월 초,위기감이 높아진 상황에서, 국민의힘과 윤석열은 김종인에게 전권을 넘기고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로써 김종인은 선대위 해체 후 재구성을 주도했다. 이러한 결정에 윤석열은 큰 불만을 토로하며 김종인을 배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 후, 윤석열 후보의 주도 아래 대선이 진행되었습니다. 한편, 이준석 대표는 김종인과의 갈등을 해소하고 윤석열과 합의를 이루었습니다. 윤석열 후보에게 ‘경질’된 뒤 이준석은 윤석열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이는 윤석열에게 큰 타격을 줬으며, 이준석은 윤석열을 지원해주는 유일한 인물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윤석열은 김씨라고 지칭한 것을 정정하는 등 분위기가 긴장되었습니다. 한편, 이재명 후보의 지지율은 상승하고 윤석열은 청년층을 공략하며 이재명의 지지율을 추격했습니다. 이에 더불어민주당은 김종인과 접촉하며 협력을 모색했습니다.

 

김종인은 이재명 후보와의 회동을 거부하며 이를 사실상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김종인은 대선 후보들을 비판하며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는 윤석열의 당선에 도움을 주었다. 김종인의 선대위 해체가 지지율 상승의 기점이 되었고, 이를 통해 윤석열은 이재명 후보를 역전했습니다. 윤석열의 당선에는 김종인의 결정적인 역할이 있었으며, 그 이후 윤석열은 이준석과의 갈등을 해소하며 지지율을 높였습니다.

 

"국민의힘은 뿌리가 대통령만 바라보는 집단"이라는 발언은 이준석 대표에게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이후 국민의힘 내부에서 당권투쟁이 치열해지자 이준석 대표는 개혁을 지지하며 발언을 반복했습니다. 장제원 의원이 주최하는 '대한민국 미래혁신포럼'에 참석하며 친윤 세력과의 연결 가능성이 나왔지만, 이를 부인했습니다.

 

그의 발언은 국민의힘이 대통령에게만 관심을 둔 집단이라는 입장을 강조했습니다. 7월 들어서 정부와 당의 지지율 하락에 대해 이준석 대표는 자신의 발언을 강화했습니다. 지지율 하락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도어스테핑을 비판했습니다.

 

 

이준석 대표는 또한 이번 징계 사태로 인해 당이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측하며 이를 경고했습니다. 이에 따라 윤석열의 지지율 하락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또한 이준석에게 과거를 잊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으며, 이준석은 이를 따랐습니다.

 

국민의힘이 대통령의 뒷담화 사건으로 인해 흔들리자, 이준석 대표는 이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당이 비대위 체제로 돌입할 때 장제원, 정진석과의 회동 소식이 있었지만, 이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김종인 스카우트설이 돌았지만, 결국 만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비대위 구성에 대한 언급도 있었지만, 제안이 있었다면 거절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2023년에는 금태섭을 지원하며 신당 창당을 추진하던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를 후원했습니다. 특히, 인요한 혁신위원회와의 회담에서 김종인은 국민의힘을 환자로 비유했습니다. 이에 대한 질문에는 김종인이 국민의힘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또한, 혁신위원회의 친윤계 의원들의 반응을 비판하면서 당 지도부와 친윤계를 겨냥한 발언을 했습니다. 이후 2024년에는 이준석과 금태섭이 3지대 통합으로 함께하게 되면서 개혁신당 영입설이 떠돌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해 김종인은 개혁신당의 공천관리위원장 직을 받아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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